

"로드. 요즘 나 힘들어."
"응?"
프람의 갑작스런 고백에 왕좌에 앉아있던 로드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꿍꿍 허리를 두들기던 프람이 에구구 하고 지친 소리를 냈다. 프람의 직전 스케쥴을 생각해보니 일상처럼 있던 훈련이 있었을 터.
"훈련이 힘든가? 좀 쉬엄쉬엄 해도 돼."
"아니, 정확히는."
프람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요한 말이야."
"...??"
요한이? 요한이 힘들게 한다고? ...왜?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던 로드가 고개를 기울이자, 주위를 휙휙 둘러보며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던 프람이 가까이 다가와 소근거렸다.
"요즘 요한이 하루도 빼먹지 않고 나와 대련을 하는데, 상태가 좀 이상해. 지쳐도 악으로 깡으로 일어나서 재대결을 요청하더라고. 방금도 요한과 대련을 하고 왔어. 그리고 오늘로 확실해졌지."
동물적 감각을 지니고 있는 프람의 말은 주의 깊게 들을 필요가 있었다. 한 차례 텀을 두고 프람이 결론을 내렸다.
"무슨 심각한 고민이 있는 게 분명해. 마음이 심란하니까 몸을 최대치로 굴리는 거야."
"고민?"
"응. 그래서 어제 맥주를 꼴을 때까지 먹, 크흠!(프람이 눈치를 보았다가 말을 고쳤다) 무..진장 먹여봤는데도 아무 소리 안 하더라고. 밤새도록 꿈쩍도 안 하더라. 로드라면 혹시 알고 있나 해서."
"전혀 몰랐다."
"어, 그래? 로드가 요한을 모르면 누가-"
"-어제 네가 왕성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걸."
"!!"
아뿔싸! 맥주 친구의 고충을 챙겨주려다 되려 알콜성 외박을 들킨 프람이 입을 떡 벌렸다. 완벽 범죄로 은닉할 수 있었는데 입이 방심해 그만 나불댔다. 제 실책이었다. 턴을 가져온 로드가 은은하게 웃으며 잔소리를 시작했다.
"너한테 이런 소리 하는 것도 민망하지만, 웬만하면 들어줬음 좋겠어. 널 걱정해서 하는 소리니까. 지나친 음주는 별로 좋지 않다."
"아니, 저기, 로드."
"내가 금주령을 내린 것도 아니고. 밤새도록 마시지는 말자고 약속한 것 같은데, 프람."
"크흠! 큼! 아 거 기사노릇 하다보면 이럴 수도 있는, 아! 나! 훈련 가야겠다!"
"방금 갔다 왔잖아."
"다른 거야!"
때로는 입보단 다리가 빠르다는 걸 잘 알고 있는 프람이 서둘러 홀을 나섰다. 애들 봐주기로 했어서 이거 늦으면 기사 간의 신뢰가 어쩌구 하면서 뛰쳐나가는데, 목소리가 까랑까랑하다.
"흐음."
아예 금주령을 내릴까 하다가 비 맞은 강아지처럼 굴길래 시간을 정해줬건만. 쫓아가서 잔소리를 지속할 마음이 없었던 로드는 프람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가, 프람이 던져준 과제를 생각했다.
* * *
요한은 프람과 함께 왕성의 병력을 총괄했다. 간단히 병력 현황을 묻기 위해 요한을 찾은 로드는 그가 기도실에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부름을 전달할까 묻는 행정인에게 고개를 저은 그녀는 직접 기도실에 가보기로 했다.
기도실이라. 선친 때부터 있던 왕성의 가장 구석에 자리한 공간이었다. 로드는 그곳에 거의 발걸음을 한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특정한 종교를 위함이라기보다는 조용히 명상을 하는 공간으로 쓰는 것 같았다. 요한이 왕성으로 온 뒤로 그의 전용 기도실이 된 것 같지만, 어찌되었든.
기도실은 본성 옆 바깥 성탑에 있는데, 언제라고 올 손님을 대비하기 위함인지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로드가 입구에서 기웃거렸다.
작을 줄 알았던 공간은 의외로 컸다. 왕좌가 있는 홀만큼은 아니지만, 위에서 쏟아지는 빛이 그대로 투과하도록 해 내부는 등이 따로 없어도 밝고 환했다. 벽에는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화분을 종종 배치하니 돌로 만들어진 성벽임에도 온화해보였다. 누구 취향인지 뻔히 보이는 배치였다. 요한.
찾는 이가 보이지 않는 것 같자 로드는 입구에서 조금 더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기도실 안쪽에 무릎 꿇은 요한의 뒷모습이 보였다. 기척을 귀신 같이 감시하던 그가 기도에 얼마나 열중했는지 로드가 길게 깔린 카펫 위로 발을 디뎠는데도 눈치 채지 못한다.
흠. 문득 장난기가 동했다. 그녀는 내리는 햇살에 지글거리는 모래 알처럼 반짝이는 금발을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요한에게로 다가갔다.
"......변치 않은 충심을 바치기 위한 제 마음을 언제나 단단하게 해주시고."
가까워질 수록 중얼거리는 요한의 말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고작 그런 치졸한 감정에 온 마음과 정신을 빼앗기지 않도록......"
어? 심각한 고민이 있는 것 같다더니 진짜였나?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원하는 것은... 명확하지만... 아니, 저는 그것을 감히 바라지 않습니다."
고해 같은 기도가 이어졌다. 두 손을 모아쥐고 열중하고 있는 요한에게 손을 댈까 말까 고민하던 로드는(어쩐지 좀 미안해졌다) 그대로 등을 돌리려고 했다. 그의 개인적인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 누가-!"
요한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중얼거리며 기도하던 낮은 목소리가 날카롭게 바뀌었다. 로드는 무언가에 밀쳐지는 느낌을 받고 그대로 뒤로 밀려나 쓰러졌다.
"어...?!"
"로드!?"
카펫이 깔릭 바닥에 머리를 부딪히기 직전, 로드의 얼굴을 알아본 요한이 굉장히 당황스러워하며 서둘러 뒤통수에 손을 대어주었다. 나머지 한 손으로는 허리를 받쳐 주었는데, 그래도 바닥에 부딪힌 엉덩이가 아팠다.
"...아야."
"로드!"
아파도 그렇게까지 죽을 정도로 아픈 건 아니었는데 요한의 얼굴이 창백해지려고 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갑자기 이렇게, 놀라서..."
허둥대던 요한이 정신을 차리고 로드를 조심스럽게 일으켜주었다. 열심히 살피는 것을 보니 어디 삐었는지 상당히 걱정되는 모양이다. 내가 그 정도로 약골로 보이나. 꼬리 뼈가 조금 아팠지만 티를 냈다가는 엉덩이를 정령에게 보여야 할 일이 생길까봐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난 괜찮아."
"샬롯을 부를까요?"
"괜찮다니까."
"불편한 데가 있다면 즉시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알았어."
툭툭 먼지를 털고 이어난 로드는 어쩔 줄 몰라하며 두 손을 모으고 있는 겸허한 기사를 보고 본론을 생각해냈다.
"네게 고민이 있다고 들었다. 고민이 있다면 내게 털어놔도 돼. 내가 너무 늦게 알아채서 미안해, 우리 사이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요한이 로드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로드가 말하시는 우리 사이란 게, 어떤 사이입니까?"
"뭐.. 네가 항상 하는 말 있잖아... 충의."
별 생각 없었던 로드가 생각나는 대로 대답하자, 이상하게도 요한이 조금 실망한 표정을 했다. 당황한 로드가 '음, 신뢰? ...영광?' 하고 요한이 좋아할 법한 단어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번 어두워진 요한의 얼굴이 밝아지는 일은 없었다. 멋쩍어진 로드가 괜히 변명했다.
"요한, 나는 널 오래 봤지만 아직도 네 전부를 몰라, 당연하게도. 내가 부족해서 잘 알지 못하더라도 섭섭해하지 말고 좀 봐 줘."
"로드는 결코 부족한 인물이 아닙니다."
겸양을 떨자 단박에 지적이 들어왔다. 어, 뭐. 옹호해줘서 고맙긴 한데.
"아무튼. 그래서 말하고 싶지 않은 거지?"
로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요한이 입을 뗐다. "제가 털어 놓으길 원하십니까." 그건 마치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경고처럼 들렸다.
"네가 뭘 말하든 들을 자신은 있어.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
"......"
로드의 미려한 미소를 본 요한이 넋을 반쯤 놓은 얼굴로 대답했다.
"로드의 다정이 가끔은 슬프게 느껴집니다. 그것이 제게 선을 그어 버리는 것 같아서... 차라리 명령해주신다면 그 핑계로, 저는...."
"으응...?"
"특별하기를 바라는 제 앞에 낙뢰를 꽂아 놓는 것 같습니다. 이 이상으로 가까이 올 생각은 하지 말라고... 아..."
주절거림은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인 듯했다. 작게 입을 벌리고 충격을 견디던 요한이 즉각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방금 말은, 주제가.. 주제가 넘었습니다. 정말 죄송합-"
"네 말, 반쯤은 이해도 안 됐어. 기분 안 나쁘니까 황송해하면서 미안해하지 마."
"네..."
울적한 요한을 보자 로드는 그가 무척 측은해졌다. 요한은 그녀가 책임져야 할 사람 중 하나였다. 로드는 요한이 그런 대로 삶에 만족하는 것보다 아발론에서 최대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요컨대 너만의 불만이 있다는 것을 알겠다."
"불만이 아닙-"
"조용히. 지금은 내가 말할 차례야. 무엇을 원해? 하나 정도는 들어줄게."
"......"
요한이 눈을 내리깔았다. 무언가 고심하는 양 입술을 물고. 로드는 요한의 답을 기다리며 생각했다. 장비든 뭐든 원하는 걸 비싼 걸로 턱턱 마련해 줘야지.
"제가 로드의 가장 가까운... 기사라는 걸 알아주십시오."
그러나 겸양한 그녀의 기사는 소원마저 그러했다. 예상치 못한 소박함에 로드가 의아해 하자, 요한이 수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직은 이것으로 족합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