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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7 사본 4-100.jpg

프라우는 눈을 떴다. 분명 좀 전 까지는 울티마 포트리스에 있었는데, 라고 생각했다. 눈에 가득 들어오는 풍경이 익숙하지 않아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앞의 풍경은 변하지 않은 채였다.

 

좋아, 꿈이 아니라 이거지. 프라우는 이번에는 손을 쫙 피고는 눈 앞에 가져갔다. 좀 전과는 달리 좀 더 짙은 피부색이 눈에 들어왔다. 손을 뒤집어보니 손톱에 칠해진 색깔도 달랐다. 손을 몇 번이나 쥐었다 폈다 해도 변하지 않았다.

 

프라우는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깨닫기 위해 기억을 천천히 더듬었다. 분명히 갈루스 제국의 황제를 꺾기 위해 울티마 포트리스로 쳐들어갔다. 거기서 체자렛을 만났고, 그 이후에 황제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엔…

 

 

“으윽..!”

 

 

프라우는 갑작스러운 두통에 머리를 감싸쥐고 주저앉았다. 무언가로 인해 조각난 기억들이 제멋대로 짜맞춰지는 느낌이었다. 프라우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세 번째로 숨을 크게 내뱉었을 때, 그는 비교적 맑은 정신으로 자신이 왜 이런 상황에 처했는지를 대략 추측하기 위해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이전 몸에서의 마지막 기억은 울티마 포트리스에서 황제가 내뿜은 큰 섬광에 휩싸인 것이었다. 그 이후의 장면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 눈을 떠 보니 이 몸에 ‘내’가 씌워져 있었다.

 

그리고 이 몸에서의 마지막 기억은… 점심을 먹고 산책 겸 운동을 하러 나가던 도중이었다. 집에서 조금만 걸으면 나오는 빈 공터에서 운동을 하곤 했었는데, 아마 그곳으로 향하던 중에 원래의 기억이 덧씌워진 모양이었다. 평소 프라우가 겪던 것과는 모양새가 달랐다.

 

프라우는 거기까지 생각을 마치고 난 후, 이번에는 다시금 이전 몸에서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이렇게 삶의 한가운데에 뚝 떨어지는 것은 평소에 일어나던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군가가 개입했다는 뜻이고, 그 중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유니버스였다. 유니버스의 계약자는 매듭을 묶을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아마도 로드가 계약한 유니버스 ‘뮤’가 한 일일 것이고, 그렇다면 로드가 지금의 자신처럼 시간을 되돌려서 돌아갔다는 뜻이 된다.

 

 

“...로드.”

 

 

프라우는 천천히 입을 열어 생소하게까지 느껴지는 한 단어를 입 밖에 내었다. 단순히 입에만 올렸을 뿐인데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아주 긴 시간을 기다려서 드디어 찾아냈는데, 긴 시간 함께 있지도 못하고 또 이렇게 헤어지고 말았다. 슬픔이 올라오던 중 그 속에서 반짝이는 희망의 빛을 발견하고, 프라우는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소매로 눈물을 슥슥 닦고는 벌떡 일어섰다. 자신에게 이렇게 기억이 덧씌워졌다면, 분명히 로드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전 생에서 그랬던 것 처럼 황제를 타도하기 위해 정벌을 떠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이 곳을 벗어나 로드를 찾아나선다면… 이전 생보다 더 빨리 로드를 만날 수 있었다. 그래야만 했다. 프라우는 얼른 집으로 달려가서 짐을 챙기고는 바로 길을 떠났다.

 

 

 

 

프라우는 최대한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이동했다. 이전 생에 그렇게 눈에 띄어 싸우다 보니 이름이 높아져 제국 8검의 자리에 앉게 된 전적이 있어서였다. 사람이 적은 길로 움직이고, 낮에는 되도록이면 숨어있었다.

 

그렇게 이동하다보니 그가 이전 생에서 태어났던 곳까지 오는 데도 한 세월이 걸렸다. 그래도 사람이 적은 곳만 골라 다닌 덕인지 그의 복장을 보아도 신기하게 쳐다만 볼 뿐,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오는 길에서는 바네사를 만날 수 있었다. 바네사는 알드 룬을 갈루스 제국에게 빼앗긴 이후 해방군을 홀로 지휘하고 있었다. 제국군을 상대로 함께 몇 번 싸워준 후, 프라우는 자신이 떠난다니 어쩔 줄 모르는 바네사를 보며 큰 소리를 쳤다.

 

 

“내가 든든한 지원군을 이끌고 올게!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면 될거야.”

 

 

그 말에 바네사는 프라우를 보내주고, 중부 대륙으로 넘어갈 수 있는 배편까지 알아 봐 주었다. 고마운 사람이었다. 바네사와 저항군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또 한참을 걸어 선착장에 도착할때까지 프라우의 생각은 오로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로드였다.

 

동부 대륙을 가로질러 오는 데 약 반 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으니, 아마도 이전 생에서 그랬던 것 처럼 로드는 중부 대륙의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아마도 곧 문레이크를 지나 다케온에 도착할 것이다. 그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프라우는 배에서 내려 곧장 다케온으로 향했다. 길을 가로막는 용병들을 좀 쥐어 패 주면서ㅡ힘으로 굴복시키면 형님하고 따르는 것이 재미있었다ㅡ다케온의 왕 아슬란을 보고자 한다면 반드시 지나갈 수밖에 없는 길목 중 하나에 자리를 잡았다. 곧 로드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가득 찼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며칠이고, 몇 주고 기다려도 로드는 오지 않았다. 분명히 ‘그’ 로드라면, 다시 되돌아갔다고 해도 몇 번이고 똑같은 짓을 해가면서 황제한테 도전할 터였다. 그러니 아무리 중간에 사건이 생겼다 해도 이렇게까지 늦을 리가 없었다.

 

프라우는 원래 머물러 있던 곳을 박차고 나와 사르디나로 갔다. 여기에도 아발론의 기사단이 출정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사르디나는 여전히 평화로웠고, 전투가 있었던 곳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뭔가 일이 생긴 것이 틀림 없었다.

 

 

 

 

그렇게 서부 대륙에 도착하고, 페르사와 플로렌스를 지나서야 프라우는 깨달았다. 로드는 애초에 출정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아니, 애초에 그가 알던 로드는 없다는 것을. 그의 기억이 덧씌워진 이 시간선에는 아발론이 아예 없어진 상태였다.

 

프라우는 천천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분명히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삶의 중간에서 기억이 덧씌워지는 것은 평소에 그가 겪어오던 방식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갑자기 이렇게 된 것은 이상했다. 분명히 유니버스가 개입했다면, 그는 로드가 있는 시간선에 덧씌워져야 정상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오래오래 생각하고 나서야, 자신은 이전 생의 의식이 무한히 복제되어 여러 시간선에 뿌려졌음을 깨달았다. 아마도 유니버스가 행한 일련의 작업과 자신이 삶을 살아온 방식 간의 충돌로 인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로드가 없는 시간선에 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프라우는 오열했다. 왜 하필 ‘이 몸에 덧씌워진 나’는 선택받지 못하여 이 곳으로 떨어져 버렸느냐고. ‘여러 갈래의 나’ 중 왜 하필 나인 것이냐고. 하지만 땅은 그의 눈물만 받아 삼킬 뿐, 아무도 그의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이 세계의 프라우는 로드가 없는 세상에 홀로 남겨졌고, 방향을 잃은 마음만 공허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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