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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7 사본 5-100.jpg

사랑이 끝날 때다.

 

루인은 내일이면 새 군주를 맞을 왕좌 앞에 서 있었다. 알현실은 즉위식을 앞두고 텅 비어 있었다. 붉은 융단과 용이 잠든 듯 고요한 석상, 창문마다 커튼이 두껍게 달린 곳에서 루인은 자신이 그 안의 장식물이라도 된 것처럼 조용하다. 그는 시종들이 청소를 끝낸 뒤 즉위식 이전까지 잠가두려던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도통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시종들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곧 사라졌고, 인기척이 떠나자 그제야 루인이 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줄곧 참아왔던 것처럼 긴 숨이었다. 부푼 가슴이 가라앉고 허리가 곧게 펴지는 숨이었지만 해방감은 없었다. 아직 그의 계획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주군을 생각한다. 일정대로라면 지금쯤 목욕을 끝내고 침실에 있어야겠지만, 그의 주군은 도통 일정대로 얌전히 구는 법이 없었다. 손이 가는 음식이면 먹어봐야 했고, 시선이 마주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창문 너머로 아발론의 밤하늘이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담장을 넘었을지도 모른다. 어려서 평민들과 함께 자랐다더니 행동거지는 물론이고 생각하는 방식마저 그들과 꼭 닮은 것이다. 가진 재능 덕분에 거리낄 것이 없는 자, 가져 본 적이 없어 거리끼지 않는 자, 모두 잃었기 때문에 더더욱 뒤 돌아보지 않는 자들 사이에서 그의 주군은 그들을 몽땅 섞어버린 것처럼 애매한 인간이 되었다.

루인은 주군을 처음 보았던 날을 떠올렸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신이 누군가의 책사 내지 비서가 되리라 생각했고, 그렇게 교육받았으므로 항상 눈을 날카롭게 갈고 닦았다. 완벽한 군주가 있다면 그를 따르고 싶었다. 두 걸음 뒤에서 걷고, 그의 신념을 세상에 실제로 가져오기 위해 계획을 짜고 싶었다. 루인의 상상 속에서 군주는 언제나 당당했으며 느리고 오만하게 걸었다. 카펫에 묻은 먼지 따위는 명예에 누가 되지 않아 자비롭고, 사람을 사람으로 이용하여 만민이 우러러보는 자를 원했다. 빵을 훔치다가 벽난로에 처박히고, 재투성이로 주방장에게 바락바락 대드는 여자애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없다고 했잖아. 다 팔아서 우리한테 나눠줄 건 없다면서. 이건 뭐야?”

“거지들한테 줄 건 없단 소리지! 썩 꺼져.”

“돼지한테 던져 줄 감자는 있고?”

몇 년을 입었는지 발목이 다 드러난 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여자애는 주방장이 숨겨 둔 감자 꾸러미를 발로 차 버렸고, 루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부엌 바닥에는 감자가 발에 채일 것처럼 많아졌다. 도련님을 발견한 주방장이 여자애의 귀를 잡고 끌고 나가겠다며 루인에게 사정했다. 루인은 요깃거리를 얻으러 왔을 뿐이라며 도로 나가려다 여자애와 눈이 마주쳤던 것을 기억했다. 실은 아무것도 분명하지 않은데 그의 눈동자만이 또렷했다.

가진 것이 없어 당당하고 원망하지 않아 깨끗하며 부끄러움 없이 날카로운 눈동자가 그에게 묻고 있었다. 너도 똑같은 사람이냐고. 그때 소년은 처음으로 이득 없이 거짓말을 했다. 여자애를 빼돌려 밖으로 내보낸 것이다. 그 애는 루인이 난생 처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조금도 모르는 채로, 주방장 몰래 챙긴 감자를 잘 닦고 있었다. 루인은 어쩐지 울상을 짓고 싶었다. 무지몽매한 자의 시선쯤은 무시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런 것에는 무력한 감정 외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고 배웠는데. 그런데 여자애가 고맙다고 인사했다.

“이 집안 사람들은 다 재수없는 귀족인 줄 알았는데. 넌 괜찮은 애구나?”

그리고 뒤돌아 걸어갔다. 루인은 그 등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원히 붙들어 두고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운명이 두 사람의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마법과 운명, 선택받지 않은 자들의 사랑 따위는 이미 사라졌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루인은 다른 생각을 했다. 저 등의 두 걸음 뒤에서 걷고 싶다고.

저 사람이 나의 계획이라고.

 

그런 시절이 있었다. 루인은 실없이 웃어버렸다. 너무 예전 기억을 떠올려선지 소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조금 들떴고, 마음이 풀어지는데 그래서는 안 됐다. 왕위에 오를 때까지 왕은 왕이 아니니까. 어서 군주의 위치를 파악하고 돌발행동을 저지해야 그가 계획한 내일이 올 것이다. 그는 돌아섰다. 알현실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곳에 여자애가 있었다. 아니, 눈을 깜빡이자 루인만큼이나 키가 큰 여자였다. 실내 가운을 입고 도망쳤는지 머리카락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도저히 내일 왕이 될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어서 잔소리하려는데, 문득 여자가 너무 가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여기까지 다가왔지? 루인은 뻔한 소리를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즉위식 이전에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알아. 많이 말했잖아.”

“많이 말씀드렸으면 들어주세요.”

“마지막이라서 그래.”

무엇이요? 그는 무심코 되물으려다 멈췄다. 쉽게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이 되기 전의 마지막 자유라면, 루인은 결코 이해할 수 없지만 소중할 법했다. 그는 자신의 왕에게 조금의 시간을 주기로 했다. 몰래 들어온 것으로는 그도 할 말이 없어서 그랬다. 루인은 자신이 소년 시절에 가졌다가 버리지 못한 습관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을 바로 여자에게서 배웠다고 믿었다. 논리적이지 못한 핑계를 대고 전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버릇이다. 지금처럼.

그런데 가운을 입은 여자가 자신의 옆에 서 있었다.

“내일 입구에서 여기까지 걸어오겠지.”

“네.”

“루인은 그 자리에 있을 거고?”

“그래야죠.”

“무거울 거야. 망토랑 왕관이랑.”

“어쩔 수 없습니다.”

“너무 무거우면 잠깐 멈춰도 되나?”

그 질문은 즉위식에 대한 게 아니었다. 루인은 빠르게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왕위가 너무 무거우면 잠깐 멈춰도 되냐고? 그게 왕이 할 말인가? 하지만 여자의 눈동자가 진솔했고 루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네.”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 적어도 자신이 배워 온 국왕의 의무 앞에서는 옳지 못했다.

“잠깐 멈추셔도 됩니다. 이 나라는 그래도 당신의 것이니까요.”

제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요. 그러자 여자가 환하게 웃었다. 계단을 올라 아직 도착하지 않은 왕관을 받는 대신 다가와 루인을 끌어안았다. 자신을 왕으로 만든 사람을. 자신을 고른 남자를. 스스로를 밀어붙이지 못하고 여자의 미래를 활시위처럼 대신 걸어 둔 남자를.

그리고 마침내 루인도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랑이 끝날 때다.

그가 키워낸 왕이 눈앞에 있다. 군주가 쥔 왕홀이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는 없겠지만, 루인은 지금 이 순간 아발론의 누구보다 만족스러웠다. 조금도 후회되지 않았다. 영혼을 팔아 당신을 왕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한 모든 이들을 무시하라고, 나는 명확하고 거짓 없는 계획과 당신의 신념만으로 이 나라를 당신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당신의 나라가 곧 나의 나라라고, 용의 이름을 주겠다고 말해서 다행이었다. 그 약속은 사실 조금의 확신도 없는 것이었다. 루인은 처음으로 허풍을 떨었다. 사랑이 자신을 더 나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게 만들었고 이내 망가뜨릴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뛰어났다. 지나치게 뛰어나 망가지지 못했다. 흔들리고 무너지지 않아서, 여자의 앞에 무릎 꿇고 당신을 위해 거짓말을 했다고 고백하지 못해서, 그 대신 사랑하는 여자의 꿈을 이뤄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서, 그 계획을 실행해서 그는 사랑을 끝낸다.

 

그리고 마침내 저기 사랑이 들어오고 있다. 국가가 걸어오고 있다. 왕홀이, 망토가, 황금과 흑색 보석이 치장하고 있는 어떠한 권위가 들어오고 있다. 알현실의 모든 이들이 일어선다. 루인은 가장 늦게 뒤를 돌아본다. 붉은 융단을 주저 없이 밟고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여자의 손을 가장 먼저 발견한다. 루인이 여자의 많은 부분을 군주에 어울리게끔 바꿔 놓았으나 손만은 여전했다. 굳은살이 박이고 가느다란 흉터가 조금 남은 손만은. 여자가 이유를 물었을 때 루인은 그 손이 왕홀을 쥐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궂은 일을 해본 적 없는 손들, 오직 고귀하기만 해서 눈물과 분노와 반항 따위를 모르는 손을 섬기고 싶지 않았다.

왕이 될 여자가 루인의 곁에 멈춰선다. 루인은 숨을 참는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면 영원히 멈추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러나 숨은 자연스레 도로 내쉬어졌고 여자는 다시 걷는다. 낮은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 왕관 앞에 무릎꿇는다. 루인은 여자와 함께 섰다가, 자신을 지나쳐 걸어가는 여자의 등을 본다. 검은 머리카락이 붉은 망토 위로 자유롭게 펼쳐지는 모습을 본다.

 

사랑이 끝날 때였다. 충성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겠지만 루인은 감정 위를 모르는 척 덮어두기로 했다. 단 한 사람만 외면한다면 누구도 모를 것이다. 아발론에 새로운 왕이 생겼을 때 루인은 자신에게 조금도 이득이 되지 않는 거짓말을 하나 더 시작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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