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쁜 초가을이었다. 햇살은 따듯하고 바람은 서늘한, 청명한 하늘이 드리운 환상적인 날씨. 여름과 가을의 경계에 있는 아발론 왕궁은 아름다웠다. 국가의 경사스러운 날을 맞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계절이었다.
평소 자연스럽고 소박하게 가꿔졌던 후원은 오늘 계절이 입히는 치장 말고도 온갖 호사스러운 것들로 꾸며져 휘황찬란했다. 신부는 따로 있으나 마치 제가 혼인하는 양, 시녀들이 한달을 꼬박 걸려 정성들여 짠 흰 레이스 천이 나무마다 걸쳐져 바람결에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다. 바네사 왕녀가 콘서트 마스터를 맡은 악단의 연주가 바람을 타고 은은하게 초록의 식장을 데운다. 그 온화한 선율에 감화된듯 사람들은 만면에 웃음을 띄곤 기쁨을 나누었다. 나라의 큰 경사이니 그러함이 온당했다.
아직 덜 익은 단풍들이 수줍게 머리꽁지들을 내밀고 있는 나무 아래 서서 요한은 그런 이들을 바라보며 애써 굳은 입매를 감추었다. 그가 서있는 곳만 서늘한 그늘 속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차려입은 예복이 거추장스럽고 답답했다.
예복은 제게 과분하리만치 근사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난생 처음 걸치는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에게 잘 어울렸다. 골라준 이의 안목이 돋보이는 차림새였다.
상하의를 만든 청회색의 비단에는 금사가 약간씩 섞여, 겉에 맴도는 따사로운 윤기가 어깨에 달린 견장과 더불어 그의 햇살같은 금발과 한 몸 인듯 잘 받았다. 또 그가 차고 다니던 영대의 빛깔 그대로 제작한 허리띠가 근육으로 단련된 날렵한 허리를 감싸고 떨어져 맵시있었다. 옷 소매에 새겨넣은 용의 불길을 뜻하는 섬세한 자수와 코트에 달린 드래곤 문양의 금단추들이 이 옷이 왕실 테일러의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목을 꽉 감싼 크라바트는 눈부신 흰색이었다. 요한은 몇 번이고 갑갑하게 숨통을 조이는 그것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가 물리기를 반복했다. 로드의 손길이 닿은 것이니 함부로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실크의 그것을 골라 목 아래 대어주시며 그리 말씀하셨었다.
-경은 흰 색이 잘 어울려. 내면이 선하니, 이리 흰 것을 대어 놓아도 더럼 타지 않을 것 같거든.
손 끝이 제게 닿은 그 자그마한 면적을 새카맣게 물들이던 욕심을 보셨더라면 로드께선 저의 내면이 순백이라 빗대지 못하셨을 것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로드의 그 말씀 때문에 요한은 끝까지 인내할 수 있었다. 로드께서 손수 골라주시는 제 생애 첫 예장이 그녀의 결혼식을 위한 것이래도. 누군가의 반려가 되시기 전에 제 맘이 이러했노라고, 쓰여질 곳도 없고 보기 기껍지도 않은 회한 덩어리에 불과한 것을 주군의 손에 떠넘기지 않을 수 있었다. 자신은 언제까지나 로드의 말씀으로 정의되어야 했으므로. 그렇게 타고 남은 재처럼 하얀 크라바트를 차고 나왔다.
"로드가 혼인을 하신다니, 사실 생각도 못했습니다."
"몇 달 전만 해도 평생 할 일 없을거라며 그리 치를 떠시더니.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걸까요."
"왕의 자리라는게 그런거 아니겠어요? 하기 싫어도 필요하다 여기시면 기꺼이 하실 분이시니까요."
"그래도 반려 되실 분을 많이 아끼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자이라와 올가, 샬롯이 도란도란 얘기하는 소리가 가까워져 왔다. 샴페인 한잔 씩을 손에 들고 거닐며 떠들던 그들은 그늘 아래 조용히 서있는 요한을 발견하고는 입을 합 다물곤 잰 걸음으로 자리를 피했다.
요한은 그 모습을 보곤 제가 표정관리에 실패했음을 깨닫고 굳은 입가를 문질렀다. 늘상 끼는 무장용의 덜그럭거리는 완갑이 아닌 매끄러운 공단의 장갑이 피부 위에서 미끌리는 감촉이 이질적이었다. 그 부드러운 것이 되려 칼날이 되어선 쓰려고 발버둥치는 가면을 북북 찢어놓는 것 같다.
반려. 반려가 무어라고. 더욱이 국혼임에야, 그것은 존재의 화합이나 평생을 함께할 영혼의 동반인을 선언하는 의식이라기보다는 전략이고 동맹이다 - 라고 생각하며, 머지 않은 날의 요한은 그제야 제가 신에게 품은 감정을 깨닫게 되었었다. 그리고 그 가정에 위안받은 자신에게 배반감을 느꼈다.
감정의 종착지가 결국 이 곳이라면, 그간 온갖 성심으로 갈고 닦은 신앙은 한낱 욕망의 포장지로 전락하는 것 아닌가. 세상을 향해 쏟아져야 할 폭포수가 모조리 자신에게로 와 고이길 바라는 것 또한 택도 없는 과욕이지 않은가. 하는 죄악감 섞인 자문이 그를 신앙의 틀 안에 구겨넣고 쾅쾅 못을 박았다.
그래서 감정을 인지 하였어도 감히 세상을 뒤바꾸는 짓은 하지 못했다. 스스로 심문관을 자처하여 불온한 신자에게 먹이 주지 않고 굶겨 죽이리라 선언하고 매장했다. 쏟아지는 은총을 받을 지 언정 그녀에게로 떨어져내릴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렇게 손수 골라 내려주시는 예복을 입고 이 자리에 온 것이다.
예복을 고르는 자리에서 로드는 영문 모르게 그늘진 얼굴이셨다. 늘 봉급으로 나오는 것을 고아원과 보육원에 다 가져다주는 요한이 엄두도 못낼 호화로운 천들에 둘러싸여 쭈삣대는 그에게 이번 만큼은 사치하여도 된다 하시곤 아낌없이 치장 해주시며 그가 감히 헤아려서는 안되는 말들을 드문 드문 내셨다.
-경에게 이제껏 이런 옷 하나 주질 못했었다니....
-진작 무어라도 더 해 줄 것을 그랬어.
-...모르겠군. 반려가 생긴다 해서 내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다 놓쳐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지.
-더러 혼인하기 전에 드는 우울감이 있다고들 하던데, 나도 그걸 겪나봐.
가끔 이리 속내를 내비치실 때면 요한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입을 다물고 성벽처럼 로드를 지켰다. 무엇이든 털어두시고 마음 편해지실 수 있다면 도구되어 쓰이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 날 만큼은 보이시는 마음이 제게 닿아 쓰리고 아팠다. 그녀 앞에서 요한은 벽이 될 수 없었다. 그저 맨 몸으로 서서 돌덩이처럼 던져지는 무거운 마음을 품으로 받고 또 받았다. 짓이겨진 가슴이 아팠다.
그 때, 예식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레가 울렸다.
웅장하고도 부드러운 행진곡이 시작되는 것과 함께 푸른 잔디 위에 깔린 버진로드의 끝으로 건장한 사내의 실루엣이 등장했다. 마련된 자리서 일어나 경견한 시선으로 그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사이로, 주군의 반려될 이가 걸음을 떼었다.
요한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는 눈으로 그를 보려 애썼다. 제 혼인식에서조차 얼음같은 낯을 하고 있는 남자, 카르티스 클라우디스.
제국의 몰락 후 갈루스의 황제는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로드에게로 왔다. 끈덕지게 로드의 곁에서 맴돌던 그는 급기야 침실을 차지하기 이르렀고, 머지않아 그 관계가 이런 식으로 결론이 나는 것은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왕의 반려가 되는 것이 결정되는 동시에 카르티스는 기다렸단 듯 제 손아래 두던 것들 중 가장 값진 것들을 지참금으로 로드에게 바쳤다. 나라, 권세, 영광, 모든 것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기도문에 명기되어 모든 신자가 그의 신에게 바치고자 읊는 것들. 그는 영영 드리지 못할 것들이었다.
그녀의 유일한 신도보다 더 거룩한 것들을 진상하는 자 앞에서 요한은 수긍할 도리밖에 없었다.
눈처럼 흰 구두가 버진로드를 밟는다. 장대한 기골에 비해 늘씬한 실루엣을 가진 사내는 어깨에 마치 신부의 베일처럼 흰 망토를 드리웠다. 무게감 있게 떨어져 바닥으로 휘늘어진 망토의 안도 온통 희다. 그 위를 수놓은 자수마저 플래티넘 골드의 실로 수놓아져 휘황찬란하였으나, 설산처럼 오연한 분위기의 남자는 그 모든 치장에 둘러싸이고도 고고한 빛을 잃지 않는다. 작금 그는 막 내려 쌓인 눈처럼 희고, 한 번도 사람 발길 닿지 않은 만년설처럼 눈이 부시다. 빛을 뽑아 수백 수천번을 제련하면 저런 색이 될까 싶은 찬연한 백금발이 바람에 어깨 위로 흐트러진다. 그를 기다리는 자가 선 길 끝으로 향하는 발걸음엔 거침이 없어, 성급하게까지 느껴지는 속도에 머리칼이 나부낀다.
카르티스가 성큼 성큼 걸어 후원을 관통하는 기나긴 버진로드의 반을 가로지를 적에, 사람들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요한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길의 끝을 응시하곤 나지막히 탄식했다. 그의 왕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눈이 부신 흰색이 그의 검은 왕을 휘감고 있었다. 어깨 위 드리운 망토와 머리 위를 휘광처럼 차지한 금색의 관 아래로, 늘 바람에 나부끼던 흑단같은 머리는 깔끔히 땋아올려져 금색의 망 안에 얌전히 갈무리되었다. 늘상 커튼처럼 가리우던 머리칼이 없으니 드러난 상앗빛의 목선을 따라 시선을 내리면 얇디 얇은 비단 실로 뜨인 흰 레이스와 진주가 부푼 가슴을 감싸고, 바로 가슴 아래 잡힌 허리선 아래로 얇은 천의 드레스자락이 꿈결처럼 퍼져 실루엣을 타고 흘렀다. 칸나가 온 마음을 다해 축복을 내린 크리스탈의 가루들이 움직이는 걸음마다 드레스자락을 타고 물결치며 반짝인다.
마법같은 광경이었다. 성스럽게 희디 흰 왕을 보며 요한은 불현듯 왕이 그에게 옷을 내려주시며 스치듯 하셨던 혼잣말을 떠올렸다.
-나도 이게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입어보는 옷일지도 모르겠군.
그때 이 자태를 보았더라면 요한은 그러지 마시라 간청드렸을 것이었다. 그의 신은 지금 장밋빛의 온기로 성화聖畵보다 아름다우셨으므로.
요한은 문득 두려워졌다. 꿈에서라도 나타나실까 하여. 꿈에서의 자신은 아마 이 그늘 아래가 아닌, 그녀에게로 달려갈 저 흰 카펫 위일지도 모른다.
각진 어깨와 무거운 망토가 아닌 부드러운 드레스에 감겨있어도 그의 주군은 위엄이 넘쳤다. 당당한 걸음으로 연단 위에 올라서서 그녀를 향해 박수를 보내는 이들을 내려보시다가, 흰 버진로드 위에서 그녀에게로 돌진하듯 걸어오는 카르티스를 발견하고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말 배우지 못한 짐승이라 해도 행복이라 읽을 얼굴이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손 끝이 싸하게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요한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당장이라도 저 남자의 앞을 막아서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이 또한 예정된 결말이었다. 마음을 가둔 관짝에서 아직도 숨 끊어지지 않은 것들이 꺼내달라 아우성을 쳐대는데, 진심으로 그가 축복을 빌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종래엔 카르티스는 달렸다. 한 시도 지체할 수 없단 듯, 긴 다리가 의례와 의식이 늘어트린 고루한 거리를 순식간에 좁히고 왕의 앞에 다다라, 그녀가 내민 손을 잡곤 제게로 끌어안았다.
커다란 품에 왕을 끌어안고 그가 웃는다.
아.
요한은 차라리 짐승이고 싶었다. 저걸 행복이라 읽어도 그 뜻이 무언지 알지 못할 미물이었다면 이리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외보다 더 무거운 마음으로 따랐던 분을, 너무나 커다래 마음 한조각 닿는 것이 불경일새라 자신을 물리고 또 물렸던 나날이 무색하도록 누군가는 저리 품에 안는다. 남은 생을 서로의 유일한 동반자로 두기로 언약하며 사랑을 맹세한다. 그가 결국 입에도 담지 못해본 감정을 고스란히 그녀에게로 바친다.
환호하며 박수치는 사람들 뒤에, 여전히 어둑한 그늘 아래 몸을 숨긴 채 요한은 입술을 꾹 물었다. 오늘은 눈물을 보일 날이 아니었으므로.
하객들의 축복 속에서 반려가 서로에게 입을 맞추었다. 영원히 서로에게 진실되리라, 서로를 존중하고 의지하며 함께 살아가리라는 서약은 서로를 향한 마음빛을 입어 어느 보석보다 눈이 부셨다.
후원을 가득 메우는 환호와 박수소리 속에서 요한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름다워야 하는 날이었다. 그 날은.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