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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엔딩 이후

 

 

갈루스 제국에서 온 사절단이 아발론에 도착했다. 카르티스가 보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오는 것은 맞긴 했다. 다름 아닌 사절단의 대표 자격으로.

 

로드는 얼마 전 카르티스에게서 비밀 리에 도착한 마법 전서구를 떠올렸다.

 

'자길 보고 당황하지 말라고 했지.'

 

여기서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으나.

 

"갈루스 제국의 손, 카르티스 클라우디스가 아발론의 왕을 뵙습니다."

 

'어리다!'

 

......이런 모습일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   *   *

 

 

아무래도 다시 돌아오면서 서로의 시간 선이 이상하게 꼬인 모양이다. 성공적으로 엮이긴 했으나, 각자의 시작점이 달랐다. 로드는 아발론의 군주였고, 카르티스는 황제가 아니라 제국의 황자였다.

 

"......"

 

로드는 제 앞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카르티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무거운 망토와 갑주가 아닌, 비교적 간편하지만 격식을 차리는 제국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황자임을 뜻하는 장식이 달려 있었는데, 그다지 화려해보이진 않았다.

 

로드는 일전의 그가 설명해준 카르티스의 배경을 떠올렸다. 말로만 제국이지, 규모는 왕국과 비슷한 갈루스의 별 볼일 없는 황자로 시작해서 황위를 거머쥐었다고 했지. 시대를 앞서나간 마도공학을 발전시키고, 축적한 힘을 이용해 제국의 동서부를 통일 시키고...

 

아무튼 그래. 황자인 건 알겠다 이거야.

 

그런데 어째서...

 

"당신 현재 연치가 어떻게 되지?"

"성년을 갓 넘겼다만."

 

이렇게 몹시 어린 건데...? 성년을 갓 넘겼다니! 너무 지나치잖아!?

 

내리깐 까만 눈이 올라왔다. 눈이 마주쳤다. 카르티스가 말했다.

 

"그렇게 신기하게 보지 마라, 대적자."

"......좀 놀라서."

 

낯만 어렸지 오만한 말투를 보아하니 제가 아는 카르티스가 맞다.

 

"그나저나 둘이서 있을 땐 말이 상당히 짧아지는군."

 

상대는 일국의 왕이다. 황자 신분인 카르티스는 그녀에게 존대를 할 필요가 있었다. 모두의 눈이 있을 때는 잘만 하더니. 둘만 있으려니 기다렸다는 듯이 야망 없고 존재감 없는 황자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특유의 오만함을 되찾는다.

 

"군주께서는 존대를 원하십니까?"

 

카르티스가 빙그레 웃으며 묻자 로드가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됐어." 제 기사들도 편히 말하는 자가 있는 통에, 존대 받는 데에 그다지 신경쓰는 편은 아니다. 무엇보다 조금 징그러웠다. 후자의 감상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런데 용케도 아발론까지 올 시간이 있었나보군. 제국에서 열심히 재앙을 대비하는 줄 알았는데."

 

로드가 턱을 쓸며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현재 카르티스를 보아하니 재앙은 무슨, 일단은 황위에 오르는 게 먼저인 것 같은데.

 

"음. 지금은 황성을 빠져나오는 게 좋거든. 아발론의 사절로 와서 앞으로의 일이 조금 편해졌다."

 

황위를 위해 노력해야 할 이 때에, 황성을 빠져나오는 게 좋다니 무슨 소리일까? 이유를 묻는 그녀에게, 카르티스가 찻잔을 내려 놓고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설명했다.

 

"독살을 당하는 때이기 때문에."

"......"

"나에겐 시간이 필요해."

"내가 도와줄 일이라도?"

"없다. 모국의 내전에 외세를 끌어들일 순 없는 노릇. 자신 없는 건 아니지만 후에 명분이 위협받으면 골치가 아파진다."

"당신이 주변 국가들과 벌인 전쟁도 딱히 명분은 없었는데."

"......"

 

로드는 촌철살인으로 카르티스의 입을 닥치게 하는데 성공했다. 뾰로통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카르티스는... 역시 어렸다! 새삼 신기하여 얼굴을 뜯어 보았다.

 

"카르티스, 잠깐 일어나봐."

 

의아해 하던 카르티스가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로드가 가까이 다가와 열심히 지난 날과 비교해보았다. 손날로 키를 가늠해보기도 했다. 키는 전이랑 엇비슷해보이면서도 한 뼘 정도 작은 것 같고. 자세히 보니 뺨에.. 솜털이? 아아니? 솜털이 있단 말이야?

 

"진짜 성년 지난 거 맞아?"

 

카르티스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자꾸 의심하지. 그렇게 안 보이기라도 하나?"

"응."

 

그녀의 솔직담백한 대답에 골이 난 듯 카르티스는 "그렇게 신기하게 보지 말래도." 라며 퉁퉁거렸다. 물론 로드는 그의 불만을 무시했다.

 

"막냇동생이 있었다면 이런 느낌일까."

 

동기가 없는 로드로서는 참 신기한 감정이다. 기사들과 허물 없이 지내기는 해도 그 친근함은 동기간 우애랑은 다른 종류의 감정이니까.

 

"동생이라니."

 

카르티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이 나빴을까?

 

"나는 그대가 나를 욕망했으면 하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

".....???"

 

대단히 물어보고 싶지 않았지만, 여기에서 얼버무리면 못 건널 강을 카르티스가 저 홀로 건너버릴 것 같았으므로 로드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달싹였다.

 

"욕망이라고 했어?"

"그래."

 

카르티스가 빙그레 웃었다. 성년이라곤 하나 로드 입장에선 한참이나 어린 얼굴이었다. 아무런 짓도 안 했는데도 죄책감이 쌓이기 시작했다.

 

"대적자는 그걸 꼭 다시 말해줘야 아는가."

"의왼데."

 

당혹스러움 보다는 이상한 기분이다. 그는 반신에 가까운 자며 대의가 먼저인 자였다. 로드에게는 카르티스가 그런 부류의 감정은 저급하다고 취급도 안 해주는 인간으로 보였다.

 

"당신이 그런 것도 알아...?"

"...날 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

"본인의 방법만이 옳다고 여기는 고집불통...?"

"......방금의 질문은 그런 대답을 원한 게 아니잖나."

 

카르티스가 쯧 혀를 찼다. 소년 왕자가 혀를 차 봤자 그냥 귀엽게만 보였다. 역시 그냥 막냇동생이잖아. 로드의 표정을 읽었는지 카르티스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대가 날 어떻게 보는 지는 알고 있어. 그리고 완전히 틀렸지. 욕망은 신에게도 있을 법한 감정이다. 그대는 신화도 모르는가?"

 

웬 아는 척이람. 이번에는 로드가 미간을 찌푸릴 차례였다. 그녀는 이런 주제를 그와 나눈다는 게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됐다. 내가 왜 당신이랑 이런 얘길 해야 하는지... 아무튼 당신한테 욕망..(재차 카르티스의 얼굴을 확인한 로드는 순간 현타가 왔다) 그런 거 느낄 일 없어."

"왜 단언하지?"

"나보다 어려서."

 

어린 황자 카르티스는 뻔뻔하게 물었고, 로드가 평탄한 어조로 답변했다. 그러자 매끄러운 카르티스의 낯에 쩌적 금이 갔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되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로드에게 물었다.

 

"좋은 게 아니라?"

"그래."

"이런."

"......"

"어쩌면 좋지..."

 

진심으로 낭패를 봤다는 듯 고심에 빠진 카르티스의 뽀송한 얼굴은, 역시 로드에게 죄책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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