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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 드 스 포 有 ⚠

⚠ 사 망 소 재 有 ⚠

 

 

피비린내로 젖어든 숨을 몰아쉬면 탁 트여있던 시야는 맑았던 만큼 더욱 부옇게 가라앉았다. 커다란 칼로 어렵사리 지탱해 둔 몸을 끌어 삐그덕, 삐그덕. 조각난 호흡이나마 그러모아, 로드…. 애처로이 불러본들, 나의 주군께서는 그런 잔혹한 운명을 예견하고 계셨다는 듯. 언제나의 기품있는 모습 그대로 황제와 내가 모르는 ‘이 다음’을 기약하며 영면에 드셨다.

 

황망으로 허정거리는 걸음으론 더 이상 왕성의 계단을 오를 수 없었다. 태고 이래 그녀만이 유일한 진리요, 한 줄기 빛이었기에. 기사로서의 지난 세월을 밝혀온 손길이 자리하지 않는 곳곳 모두가 어둠인지라― 나를 둘러싼 천지가 검게 물들더니, 머지않아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방향을 잃은 다리가 제 위치를 짐작해볼 새도 없이 부식하는 공허 아래로 끝없이 추락했다.

 

성대한 장례식에서 뛰쳐나오면서도 하얀 관 주변에 단조로이 장식되어 있던, 뿌리로부터 멀어져 목대만 덜렁 남아 화려히 시들어가는 식물의 잔상이 잊히지 않았다. 차라리 사그라드는 추억과 나란히 쇠락해 버리길 소망하는 나와 지독하게 닮아 보였기 때문이겠지. 이를 악물고 구슬피 울려 퍼지는 진혼곡을 뒤로하는 내내 탄식으로 흐느꼈다. …추모를 입 밖에 내는 게 나로서는 여직 버거웠다. 이승에서의 끝 배웅마저 불충으로 마무리한 내가, 무척 미웠다.

 

그날을 기점으로 나는 나를 작은 방 한 칸에 유폐했다. 어느 의미론 주군을 지키지 못한 신하로서의 양심이 쓰려 와, 스스로를 죄인이라 각인하는 움직임이었는지도 모른다. 비애가 심신을 좀먹어가거나 거칠한 폐부 전체가 거무죽죽한 울분으로 물들어간들 내버려 방치해 두길 어언 보름. 상심 어린 속내엔 비탄이나 후회만큼 얄궂은 질투가 태양을 잃고 난폭해진 짐승마냥 한참을 사납게 굴었다.

 

로드, 왜 제게는 기회를 주지 않으신 겁니까?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다면 로드 대신 제 목을 내걸어도 괜찮았을 테지요. 저 또한 그 남자에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각오로 그대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고자 늘상 곁을 지켜온 저였거늘, 어찌하여…. 유난히도 졸렬하고 유치한 열패감이 바짝 이를 세워 아물지 않은 환부를 바지런히 헤집어댔다. 정직하게 아롱져 떨구는 것은 눈물이요. 방울방울 스미어 함께 투신하는 건 미련이었다. 자상처럼 깊게 남아 지워지지 않을 추억들이, 다신 오지 않을 봄날의 정경 따위를 흉내 내며 자못 무참히도 흩날렸다.

 

일그러진 현실을 창문 걸어 잠그듯. 수면으로 얼버무려 회피하고자 들어도, 시리도록 음울한 고요가 스산히 감도는 매 새벽을 뜬 눈으로 지새워 무리였더라지. 앙상하고 얕은 잠을 겨우겨우 이불 삼아 덮어본들, 물에 젖은 양피지처럼 축축히 널브러져 있다 소스라치게 놀라 깨길 수백 번. 더는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도 아닌 기도로 처절히 빌어 본 건 아마 수천 번….

 

갈라진 입술을 달싹여 희박하게 사려하는 찰나조차 차디찬 절망으로 날카롭게 점철되어 고통스럽기만 했다. 갈 곳 잃은 설움을 늪같이 펼쳐놓은 가운데. 줄곧 일자로 다물고 있던 입꼬리를 비틀어 비소를 머금곤, 그 안에 고꾸라져 있으면. 새끼손톱만치 남은 이성이 닳아 빠진 번뇌 사이사이로 애잔하게 들러붙었다. 내 모든 인식이며 분별이 그녀의 부재를 신호탄 삼아 왜곡되는게 느껴졌다. 하루가 다르게 일렁이는 의식이 참담한 상실로 마모되어 갔다. 푸름이 거듭 짙어지는 안색은 잠이 부족하다는 증거. 나는 점차 무너져 내렸다. 병들어가고 있었다.

 

“힘든 순간은 갑자기 닥쳐오기 마련이라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대비하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요. 허나……. 마음이란 게, 잘 다스려지지 않는군요.”

 

걸터앉은 침대 옆. 비스듬하게 기대어 곁에 자리한 검 자루를 상처투성이 손끝으로 가만히 쓸어보며 흐리게 읊조리니, 어젯밤 베갯잇을 적시던 습기가 또 울컥. 초승을 덧그려 연하게 비쳐든다. 로드, 로드가 아니었다면 저는 아직도 빈민가에서 불신을 끼니 대신 끊어 삼키고 있었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여기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을 테지요. 누군가를 위한 인생도 있다는 걸 그대로 하여금 알게 된 저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새 뜻으로 세운 이 삶을 타인을 위해 소진한다면….

 

제게 그 누군가란, 꼭 로드가 되어 주셨으면 했습니다. 이 한 목숨을 애써 부지하기보다는 미소 짓는 때가 저릿하게 식어갈지언정 로드를 위해 명예롭게 죽고 싶었습니다. 가난한 진심이나마 사명으로 다듬어 오직 그대에 한정해 헌신으로 안겨드리고 싶었습니다. 분명 그것이야말로 기사라는 자리에 발붙여 전해드릴 수 있는 최선의 고백이었을테니.

 

유언을 마지막으로 귀에 담은 이가 저였다면. 만약 그랬다면, 저는 의연하게 로드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예, 부질없는 회억이지요. 허나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때를 되새겨 누차 목도하고 맙니다. 로드를 지키지 못했던 저를 자꾸만 다그치게 됩니다. 폐허가 된 가슴에 머무르는 것이라곤 잇따라 만발하는 악몽, 문드러진 충정의 단면을 먹먹히 긁어 깎아내는 우울만이 고작인데다. 움푹 패인 마음 속 고랑엔 부도덕한 은애며, 억지스레 쪼개어 그 태조차 없애길 반복했던 위태로운 연모를 대신해 서늘한 곡소리만이 창백하게 고였습니다.

 

나 이미 그대의 빛에 눈이 멀어있었으므로. 한 평생 사랑스럽다 여기던 익숙한 검정이 걷혀, 음울하기 짝이 없는 진짜 암흑이 도래한 당장을 견딜 수 없습니다. 로드의 공백이 버겁습니다. 맞이한 전투의 승패를 따라 상흔을 수없이 새겨온 사지보다도, 박동하는 연심이 날아오르지 못하게 뼈로 새장을 지어 가둔 왼편 가슴에 떨칠 수 없는 통증이 밤안개처럼 잔류합니다. 잠시나마 따스하게 흐르던 시간들이 다시금 거칠어집니다. 낯설어집니다.

 

그토록 소중히 여기시던 아발론을 등지고 나아간 큰 뜻을, 사사로운 슬픔에 휘둘리는 저로서는…. 애석하게도 영원토록 이해할 수 없겠지요. 허나 애도라는 조촐한 두 글자론 출구도 없이 모질게 파도치는 심정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습니다. 동경하던 만큼이나 전력을 바쳐 지켜온. 또 주제넘게 연모해 마지않았던. 그러나 하늘이 앗아간 지금, 이제는 허상이 되어버린. 그대의 가녀린 양팔이야말로, 우는 법을 침묵에 묻어둘 정도로 뒤틀려있던 빈민가의 소년이 보다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두터운 믿음과 포근한 신뢰로 따스히 품어주셨다는 것을. 이처럼 나락의 끄트머리에 닿아서야 비로소 절감합니다.

 

재난다운 현실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무릎을 꿇고만 나약한 이를 바보 같다 꾸짖으셔도 좋습니다. 허니 이런 절 안쓰럽게 여기어 어느 밤, 덧없는 꿈에라도나마 잠시 만나러 와 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저 환하게 한 번. 웃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뾰족히 난립하여 오시는 길을 가로막는 인과라면 이번에야말로 뼈를 갈아 뒤집어 엎겠습니다. 무자비한 칼날에 끊어졌던 운명의 끈. 그 붉은 실을 어떻게 해서든 다시 이어 보이겠습니다. 저는 그 어떤 시련이라도 감내하여, 변하지 않을 충심으로. 여기. 늘 여기에서 부름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감히 청하건대 로드께서는 부디….

 

간원으로 깍지 낀 손을 이루는 흉 많은 가락. 사소한 요철을 만드는 마디마디가 기어코 덜덜 떨려오자, 깜깜한 실내에 높이 차오른 좌절은 푸석한 금발에 깃든. 본디 타고 난 밝음까지도 사치라 질타하듯. 잿빛 동공과 비슷한 채도를 강하게 내리쳐 찬란했던 광명의 잔해를 잘게 부숴내었다.

 

요한, 그거 알아? 세상에는 직접 이야기하지 않으면 결코 전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어. 그러니 훗날, 무언가 네가 진정으로 바라는 일이 생긴다면. 나는 앞으로의 네가 그 바람을 속으로 삭이기보단 소리 내어 들려줄 수 있었으면 해. 적어도 나에게만은, 꼭 그랬으면 해. 이윽고 언젠가 포근한 온기로 속삭여졌던 다정한 음색이 고막을 짧게 두드리곤 점멸한다. 푹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어 메어오는 울대에 간신히 힘을 주자, 금세 칼칼한 위화감이 온 기도를 서성였다.

 

“저 요한은. 로드께서 돌아오시리라, 굳게…….”

 

쉬어버린 탓에 금방이라도 툭 끊어질 듯. 가늘게 이어지던 목소리가 감정을 버티지 못하고 서서히 이지러지니, 차마 더 소리 내 잣지 못할 애달픔만이 적막 가운데 짓물러 간다. 야무지게 여미지 못한 눈가에서 뚝뚝 흐르는 건 여느 때보다 무겁고 투명한 그리움. 새 동이 틀 때까지도 아득한 저편으로 보내는 호소가 쉬이 멎지 않았다. 다 자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제법 희고 마른 울음소리였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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